깨달은 사람이 어린이와 같다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마하리쉬가 답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 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황이 어린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지도 않으며 어린이들이 그 상황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깨달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나는 누구인가, p126-127]
예수께서 어린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신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천국을 장소의 개념 또는 사후에 가는 곳으로 알아듣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마치 법조문처럼 늘어놓고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가 길을 잘못 들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마하리쉬는 어린이와 같은 상태가 되기 위한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육체와 마음의 모든 의식적 행위의 이면에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가정이 있다. 생각하고 기억하고 행위를 하는 등의 생각 속에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나'가 가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나라는 생각(Aham Vritti)'"으로 불렀다.
이 '나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마음인데 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짐으로써 생각하는 자도 행위자도 없고 개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어지는 경지, 즉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나라는 생각' 또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그것이 발전된 '몸이 나'라는 생각을 없앤다면 우리는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어린이를 이 세상에 적응시키기 위해 주입된 온갖 관념과 그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의식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관념들이 모두 '나라는 생각'과 '몸이 나라는 생각'에 들러붙어 있다.
마치 금 덩어리에 붙어 있는 불순물과 같은 이러한 관념들과 이 관념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몸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벗어날 때 우리는 깨달은 자가 되면서 금덩어리로 비유되는 '참 나'의 상태 즉, 천국에 들어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호킨스) 명상에는 보다 형식이 따른다. 사람은 삶에서 물러나 혼자서 조용히 앉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간다. 내면으로 계속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은 사람을 일상생활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관상은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진실을 보고, 그것을 하루 종일 마음 속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것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의 완전한 의미가 점점 더 명확해진다. 그래서...관상은 성찰과 보다 비슷하다.
많은 영적 그룹에는 그날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한 문장이다. 사람은 하루종일 그 문장과 함께 논다. 계속해서 그걸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의 의미가 점점 더 심오해진다.
한번은 한 달 동안 시편 93편에 대해 명상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한번에 한 문장씩, 각각의 문장에 대해 하루종일 명상하곤 했다. 그것은 한 달이 걸렸던 것 같고, 시편 93편이었다. 그러자 그 완전한 의미가 점점 더 명확해졌다. 그 의미의 완전함이 저절로 드러났다. 그것은 논리를 통해서가 아닌데, 왜냐하면 사람은 신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이 제게 무엇을 의미합니까?’하고 묻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상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명상은 모든 걸 중단하고 시간을 따로 내야만 한다.
명상은 삶에서 분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요일날 교회에 가는 일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관상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한 방식인데 이것은 장(field)의 내용보다는 장 자체에 대한 주의 집중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관상과 함께, 삶은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신에게 자신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을 드러내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관상은 명상보다 더욱 빠른 발전을 가져다줍니다.[호킨스 박사 2005년 대담 중에서]
질병이란 마음의 작용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바로 그 마음이야말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병을 A → B → C의 세계에서 오는 신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치료하려 한다면, 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 내어 치료하는 일을 할 수 없으며, 치유보다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단계에 머물게 된다.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고질병을 순식간에 치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는 오랜 세월의 내적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시스템도 최소한의 힘으로 전체 시스템을 변경시킬 수 있는 임계점(critical point)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장기에서도 졸의 움직임 하나가 게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믿는 믿음 체계의 하나 하나가, 더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그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곳, 어느 시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껏 기술한 과정을 통하여 질병이나 최악의 상황에서 회복된 누군가가 있어 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화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나 인류 전체에 자비심을 품는 것은 상황이나 질병의 호전을 위해서나 의식의 진화를 위해서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치유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유를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이 길만이 육체적, 영적 침체 상태를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다.
[의식혁명 8장]
의식의 내용만을 본다면 우리는 자아를 그만큼 한정된 것으로 경험하는 셈이다. 반면 의식 자체를 본다면 그것은 자아를 한정되지 않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이처럼 한정된 자신에 대한 관념을 극복하고 자아를 의식 자체와 동일시할 때에야 우리는 깨달은 사람이 된다.
순수의식의 경험이 갖는 특성 중의 하나가 시간 관념의 상실이다. 의식이란 모든 형태나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경험되고 이런 현상은 어느 곳에서나 똑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깨달음의 상태란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상태인 것이다. 분리란 한정된 우리의 인식에서 오며 하나의 관점을 취함으로써만 생겨나는 것이다.
...순수의식의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의 흐름이 정체되는 것이고 무한한 힘과 긍휼, 부드러움, 그리고 사랑의 상태가 나타나는 데에 있다...자신을 진정한 자아로 볼 수 있는 능력은 한계 있는 자아에 대한 관념을 떨쳐 버리는 과정의 최종 단계가 된다.
이러한 참 나를 의식으로서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필요한 절차들은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이러한 가르침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신을 한정된 것으로 보는 개념을 점차적으로 없애는 데에 있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 그렇게도 드문 것은 그 절차를 따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상태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의식혁명, p237~238]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병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안다면 그대는 기뻐하고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슬픔도 고통도 번민도 없다. 그대가 모든 역경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의 모든 고통은 그대가 하느님을, 하느님만을 향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 [그아감, p 109~110]
= 태생 천주교인이었던 우술라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겪은 심한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답을 구하다 만난 에카르트, 병원에서 고통치료사로 일하면서 가장 효험을 본 방법론을 찾다가 만난 에카르트에게서 나는 종교가 아니라 영성을 추구하자는 호킨스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에카르트는 '영원한 탄생'을 막는 세가지 장애물로서 시간과 육신, 그리고 특이하게도 다수성 또는 수를 든다. 우리가 분열되어 단순하지 않음을 하나의 장애로 보는 것이다.
13-14 세기 로마 가톨릭 시스템 안에 있던 사람이 1985년에야 복권 비슷한 복권이 되고 아직 공식 복권을 얻지 못한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계가 얼마나 영성에서 벗어나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